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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fbc16
제목 창조론 교육의 중요성
작성일자 2016-06-21
조회수 3495
창조론 교육의 중요성


1. 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나?

초·중·고 학생이 대학교에 진학하면 70% 이상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청소년 자녀를 둔 가장으
로서 학생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두려운 마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이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아이를 훈련시키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잠
언22장 6절 말씀처럼 아이를 어렸을 때부터 교회 안에서 나름 열심히 성경적 교육을 시켰다고 생각
하는데 왜 우리 자녀들은 청년이 되면 교회를 떠나는 것일까? 한 집안에서 부모는 교회에서 열심을
내는 성도인데 자녀는 교회를 등진 사례가 이제는 너무 흔하여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도 않는다. 우
리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이런 불편한 상황을 우리 모두가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
다는 사실이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예: 본이 되지 못한 부모의 이중적인
신앙생활 등) 나의 개인적 경험을 들면 대학생 때부터 부모로부터 독립적 생활을 시작하면서 세상의
문화, 가치관, 철학에 본격적으로 노출이 되고, 교회나 가정에서 배워온 모든 성경의 진리들은 진화
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무차별적 공격을 당하게 된다. 이런 영적 전쟁 상황에서 대부분의 청년들은 세
상의 공격에 백기를 들고 세상과 동화되기를 쉽게 선택한다. 대부분은 이런 쉬운 선택을 해버린다.
“하루하루 사는 것도 힘든데 눈에도 보이지 않는, 당장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할 것 같은 괜한 고집(?)
을 피워 무엇 하겠나” 라며 자신의 백기를 합리화하고 얼마 저항하지 못한 채 패배를 선언해버리고
만다. 설상 이 영적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이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감을 갖고 이렇게 교회는 청년들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쉽
게 백기를 들게 만드는 것일까?

2. 믿음의 기본기: 창조론 & 보존된 말씀
우리는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시작과 끝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1장 1절의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말씀과 계시록22:18-19의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
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
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는 말씀을 통해서 나는 창조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과 보존된 말씀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믿음의 근간/기본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3. 창세기는 은유적/신화적 비유?
청년들은 어렸을 때 교회에서 창세기에 기록된 사건들을 문자적/역사적 사실로 배웠다. 하지만 세
상의 진화론 교육에 세뇌되기 시작하면서 창세기 사건들을 금방 신화적/비유적 교훈으로 변질시켜버
리고 만다. 혹 창세기의 사건들을 부분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자적 6일 창조를 그대로 믿
는 사람은 교회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무수한 세월이 존
재한다는 갭(간격)이론은 그 갭 기간에 우주의 탄생과 진화, 천사의 타락, 생물의 진화가 있었다고
인정한다. 이렇게 갭 이론은 진화론적 세계관과 성경의 진리 사이에서 중간적 타협점이 되어 왔다.
60년대부터 헨리 모리스 박사를 중심으로 시작된 창조론 운동은 성경의 사건들이 매우 과학적이란
것을 밝혀내기 시작했지만 진화론 패러다임 속에서 백 년 이상 진화론적 세계관을 강요받고 세뇌되어온
현대인들은 수 백 만년, 수억 년이란 단어를 교회에서조차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성경적인 교회라 할지라도 창조론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별로 없고, 간혹 주일학교
의 한 어린이가 어른에게 “공룡은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물었을 때 이에 대해 선뜻 성경적/과학적
/역사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어른은 교회 내에 과연 몇 명이나 있을는지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문자적 해석을 통한 성경의 연대기가 대략 6천년이라고 하는데 우리 자신이 왜 그렇게 믿고
있는지 그 믿음의 근거를 일목요연하게 설명 가능한 성도는 교회 내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 교회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은 상태에서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지
도 모르겠다. 창세기 사건들에 대한 과학적/논리적 질문은 교회 내에서도 일종의 금기사항처럼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에 대해 시원스럽게 대답해줄 성도들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부터 교회가 이런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을 지키는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는가? 하나님 말씀이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인가? 하나님 말씀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다고 우리는 믿고 있지 않았던가?
창세기에 대한 세상의 공격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기에 우리는 좀 더 적극적/공격적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을 잃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벧전3:15) 하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창세
기 사건들에 대한 과학적/논리적 교육을 통해 우리는 담대함으로 우리 믿음을 변호하고 아이들을 지
킬 수 있어야 한다.

4. 문자적 해석의 중요성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의 진화론을 성경의 사건들과 중간지점에서 타협하려는 시도가 바로
갭 이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을 지키는 데 있어서 중간지점이란 없다. 그 동안 교회는 중간
지점에서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에 어필하기를 힘써왔다. 하지만 그 중간지점은 언제나 패배점이었다.
갭 이론도 그 패배를 보증하는 중간지점이다. 갭 이론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수많은 사건
과 진화가 있었고 그러므로 성경기록이 오늘날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고 그래서 성
경은 맞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진화론적 주장이다. 그럼 진화론이 오류로 밝혀지면 성경기록도 오류
가 되는 것인가? 왜 불안전한 세상이론을 기준으로 완전한 성경기록의 진리여부가 결정돼야 하는가?
과연 갭 이론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기나 하는 것인가?
오늘날 과학의 어떤 분야에서도 진화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직 지적설계만 발견될 뿐이
다. 그 수많은 세월 속에서도 연속적 중간단계 화석은 아직까지도 단 한 번도 발견된 사례가 없다.
한 종(kind)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는 증거를 발견한 사례도 없으며 과학자들이 이를 구현해 본
적도 없다. 화석연대측정법도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를 사용하여 그 적용에 있어 심각한 오류
가 있고 탄소측정법도 그 대상과 방법에 있어 여러 한계점이 있기 때문에 특정한 케이스에만 적용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탄소측정법은 지금까지 무분별하게 화석연대측정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혀
일반적이지(general or universal) 않은 탄소연대측정방법으로 유추한 수백만, 수억 년 연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런 과학적 허점을 간과한 채 과학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진화론적 세
계관을 그대로 성경에 적용한 것이 지난 수 십 년간, 그것도 아군진영의 믿음의 형제(?)라는 갭 이론
주의자들이 이뤄놓은 업적(?)이다.
사실 과학이라 불리는 많은 방법들이 이런 비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특정 가정을 하고 실
험결과는 그 가설에 그럴 듯하게 끼워 맞추는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물리학에선 뉴턴역학과 아인슈
타인의 상대성 이론 이후로 세상을 뒤흔들만한 발견을 못하고 있다. 이를 빗대어 일부 정직한 과학
자들은 현대 과학자들이 강아지처럼 빙빙 돌며 꼬리 물기를 하고 있다며 현 과학의 발전은 실상 정
체되어 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많은 현대 과학들이 결론을 미리 내고 그 스토리라인에 맞춰 데이
터를 획득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선입견이 작용하는지 어느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 사실 주관적 철학에 가까운 것이 많다. 인위적으로 설정
된 철학, 특히 진화론 패러다임과 색깔이 다른 과학들은 공정한 평가를 받기도 전에 무조건 폐기시
켜 버리는 것이 오늘날 과학 세계의 현실이다.
갭 이론주의자들은 이런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진화론적 세계관을 창세기 1장에 적용시켜왔다.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수많은 세월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6일 창조의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아무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긴 세월이라고 자의적 해석을 한다. 이럴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4일째 해와 달이 창조되었는데 3일째 창조된 식물들은 그 긴 하루(?)를 광합성작용 없이 견
뎌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6일째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31)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전에 수많은 진화를 거듭하면
서 수많은 죽음(death)들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매우 좋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로마
서 8장 22절에서 아담의 죄로 인해 온 창조 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른
다고 하였다. 이는 아담이 죄를 짓고 그 후에 죽음(death)이 숨(영)이 있는 존재들에게 임했다는 말
이다. “온 창조, 모든 것”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포함해야 한다. (참고로 식물은 영이 없기 때
문에 소멸되어도 “죽음”에 해당되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갭 이론을 적용한다면 6일 창조 전에 죽음
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6일 창조 후에 “매우 좋았더라.”라고 하신 말씀과 상반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갭 이론은 성경을 세상의 과학으로 포장하여 겉으론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성경적 해
석으론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우리
가 자연적 해석/시각을 창세기 사건들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사건들은 우리 통념으론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시간과 공간 물질의 창조, 생명의 창조, 이 우주의 창조 모든
창조가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한 예로 이 끝없어 보이는 우주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만드셨을까?
우리의 자연적 통념으로 이해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만드시는데 수억 년이 필요하신
분이신가? 성경은 이 우주창조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창1:12 “…또 별들도 만드시고” 라며
이 우주의 탄생을 단 몇 글자로 기록하고 있다. 저 큰 우주가 어떻게 저 몇 글자로 생길 수 있는가?
라는 인간의 자연적 시각/사고를 적용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하나님
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또 별들도 만드시고” 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저 큰 우주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하
나님께서 이 우주를 한 말씀으로 만드신 것을 믿는다면 성경의 다른 초자연적 현상들에 대해서도
이해 못 할 것이 없다. 사실 이런 현상들이 우리 눈에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우주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지 않으시면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실 수 있으신 분
이시다. 단지 우리가 그 초자연적 현상을 이해 못할 뿐이다. 이렇듯 현대 과학의 이해를 뛰어넘는 초
자연적 사실을 이해하려면 성경기록의 문자적 해석과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성경의 첫 장 첫 절을 믿지도 못하면서 그 다음 성경구절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사실 모든 무
신론자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성경의 1장 1절을 불신하면서 만들어진다. 창세기 1장 1절은 성
도의 믿음의 시작이요 불신자와 성도를 갈라놓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5. 자의적 창세기 해석은 구원과 상관없음?
진화론적 세계관을 성경에 적용하면 수많은 자의적 해석과 오류를 거듭해서 낳게 되어있다. 이는
마치 처음 여러 사실이 잘못되면 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오류들을 또 바로 잡기 위해 끝없는
오류들을 다시 만들어야 내야 하는 상황과 같다. 그래서 진화론적 성경해석은 그 시도 자체부터 어
리석은 것이다. 이런 자의적 해석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구원과 관련 있
는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사건을 신화/교훈으로 치부해버린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세상에 어떻게
죄가 들어왔으며 그 죄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과(창1:31) “온 창조 세계”가(롬8:22) 지금까지 신음하
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간과 동물이 영적/
육체적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인간과 동물뿐만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죄로 물들었기에 하나님께서
는 하늘들을 불에 해체시키시고 원소들도 뜨거운 열로 녹이신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 창조하
시겠다(벧후3:12-1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듯 아담의 불순종 사건은 이 우주 전체를 흔드는 사
건이었으며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사 거룩하고 흠 없는 어린 양을 준비
하신 것이다(엡1:4). 성경의 모든 기록은 그 아담의 죄로 인해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
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렇듯 아담의 불순종 사건은 성경에서 우리가 왜 예
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 알려주므로 구원의 시작과도 같은 중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
난 중대한 사건을 자의적으로 영적해석 해버리고, 신화적/비유적 사건으로 치부해버리면 과연 우리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왜 예수 그리스
도를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죄의 기원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면서 구원의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늘날 소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교인들이 창세기 사건을 한낱 신화로
취급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귀중한 자신의 영혼을 상대로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장난을 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영혼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면 먼
저 본인이 아담의 불순종 사건을 문자적/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지 스스로 검증해보아야 할 것이
다.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 1장과 아담의 불순종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못한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에 대한 그 불신자의 태도는 불 보듯 뻔한 것이다.

6.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역사관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창세기를 읽는다면 창세기에 기록된 “하루”를 “수많은 세월”로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같다(벧후3:8)”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것은 우리가 회개하길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벧후3:9) 동시에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긴박성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사람의 천년은 하나님께는 짧은 하루와도 같으므로 너희가 빨리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영접하라는
구원의 긴박성을 표현한 것이지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라는 모순된 말(oxymoron)이 아니다. 하루를
천년으로 간주하고 6일 창조에 적용해 봤자 6000년을 더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화론자의 수백만, 수억 년 타임스케일 적용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지적을 피하기 위해 갭 이론자들은
하루를 수억 년으로 하자는 억지를 부리지만 이런 일관성 없는 자의적 해석은 성경해석에 끝없는 혼란만 준다.
사실 지구/우주의 역사를 논의할 때 갭 이론자들의 긴 타임스케일은 또 다른 위험 요소를 제공하
는데 그것은 바로 곧 돌아오실 예수님의 재림의 긴박성을 제거시킨다는 것이다. 냉철히 생각해보면
인류의 역사는 한 시도 온전할 틈도 없이 긴박하고 격동적인 변화를 거듭해왔다. 주 후로 지난 2000
년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세계 각지에서 온전한 날이 별로 없었다. 인류의 역사는 실제로 비교적 짧
은 기간 안에 수많은 변화들을 겪었고 지금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인류의 문화가 수억 년 동
안 천천히 변화해왔다는 고고학적/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다. 문자와 문명의 기록도 대홍수 및 바벨
탑 사건 이후 것들만 발견되고 있다. 문명발생 순서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장 먼저 생겨났으며
(성경이 말한 그대로) 그 다음 인도, 그 다음 황하문명이 생겨났다고 고고학은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바벨탑사건 이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동쪽으로 인구이동 방향과 일관성이 있다. 이렇듯 고고학
적 증거들은 성경의 역사가 실제 일어났다는 것만 증명할 뿐이다. 인류 문명의 발달 이후로 온 인류
는 제국의 탄생과 멸망을 거듭하면서 모든 것이 급격히 변해 왔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
림도 도둑처럼 갑자기 들이닥칠 것이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도 그와 같았으니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건축하
였으되 롯이 소돔에서 나간 바로 그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내려 그들을 다 멸하였
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같으리라“ (눅17:27-30)
이렇듯 성경의 타임스케일은 짧고 그래서 긴박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주장하는
이 인류의 타임스케일은 어떠한가? 수 백 만년, 수억 년 타임스케일 속에 세상이 급격하게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긴박성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항상 ‘이래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이다’라는
평화론, 안전론이 대세이다. 우리 인간이 똑똑하게 진화해왔으니 우리 미래는 더욱더 밝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화론적 세계관이고 이에 물든 갭 이론주의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인류 종말의 긴박성, 개인
구원의 긴박성을 결과적으로 모두 제거해버리고 만 것이다. 날이 지날수록 세상은 더 풍요롭고 평화
스러울 것이며(실제로 지금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이 인류의 영원한 공생을 위해 우리 인간 스스로
노력하여 유토피아를 만들어야 한다는 휴머니즘이 진화론자의 기본 철학인 것이다. 이 휴머니즘이란
고상한 단어에 속으면 안 된다. 휴머니즘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
는 허황된 거짓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지구와 유토피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고 계신가? 하나님께선 사람
에 대해 그리 희망적이지 않으시다. 아니 매우 절망적이시다. 그래서 8명만 살리시고 대홍수로 모든
인류를 멸하셨다. 우리 존재와 실체를 정직하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지구 각처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들을 보라. 이는 인
류가 지난 역사상 항상 겪어온 문제이고 앞으로도 이 분쟁들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하나
님께서는 죄로 신음하는 지금의 이 지구와 우주까지도 모두 없애 버리시고 새롭게 만드시겠다고 말
씀하셨다 (벧후3:12-13).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계22:20)” 라며 예수님께서 직접 “속히” 오시겠다
는 긴박한 약속을 하시고 3번째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런 역사적 긴박성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
야 할 올바른 역사관이다. 성경신자라면 지금의 지구는 곧 없어질 것을 믿어야 한다. 없어질 지구에
그렇게 공들일 필요가 없다. 헛수고일 뿐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그 분의 이야기 (His-Story)이며 기
원전 4000년경 시작되어 곧 그 마지막 페이지가 덮어질 것이다. 개인의 재물과 명예도 모두 사라질
것이고 결국에 남는 것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위해 한 일뿐이다.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
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고후5:10)
이런 짧은 하나님의 타임스케일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런 영적 긴박성을
갖길 원하신다. 그래야 주님의 일들을 하는데 조급한 마음으로 우리 발이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주
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선하고 신실한 종이라면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겠는가? 시험날짜가 언제인지 모른다면 지혜로운 종은 미리 시험 준비를 하지 않겠는가? 그 시험
날엔 하루 전날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갑자기, 도둑처럼 그 날이 임한다고 하셨
기 때문이다(마24:42).
주인을 위해 지금 당장 움직이는 종이 신실한 종이다(마24:45-46). 지금은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
나고 풍요와 평화가 넘쳐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론 마지막 세대로 가고 있는 음란한 시대(마16:4)이
다. 디지털정보화를 통해 모든 사람의 신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정부에서 개인 감시와 조절이 시
스템적으로 가능한 시대가 왔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짐승의 표로 사람들의 모든 행동범위와 생계와
사상까지도 조절할 수 있는 시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로써 온 세상(계13:3)과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계13:7)들이 적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날이 올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
해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날에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불못에
던져져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
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
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
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
았더라.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
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
라.” (계20:10-15)

죄로 물든 이세상에 관해 이런 비관적 종말론적 세계관/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인들이다. 대신에 그리스도인은 죄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둔, 긍정적 세계관/역사관을 갖고
있는 해피엔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복된 소망이다. 신랑이 오실 때 우리는
밭에서 씨를 뿌리고 거두고 있어야 한다. 한 아이가 부르짖을 것이다 “신랑이 오십니다!” 이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길 원하는가? 하던 일을 멈 추고 얼른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겠는가?
얼굴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내 모습이 신랑을 맞이 할 준비가 되었는지, 급한 마음에 침이라도 뱉어서
얼굴의 때를 닦아내지 않겠는가? 그렇다 신랑이 오실 때 우리는 우리가 순결한 모습으로 발견되길 소망한다.
공중에서 열릴 혼인잔치에 우리 모두가 순결한 신부의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마22:2-9).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종말론적이며 긴박한 세계관/역사관을 가져야 하며 이것은 창세기의 6일 창조와 죄의
시작을 문자 그대로 믿어 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기록에 대한 믿음은 믿음의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것이다.

7. 맺음말
창세기 사건은 구원의 교리와 전혀 상관없지 않다.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사건들은 문
자적/역사적으로 받아드려야 하며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올바른 세계관과 역사관
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성경적 역사관은 곧 돌아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게 만들며 신실
하고 지혜로운 종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책 가운데 가장 먼저 믿어야 할
창세기가 가장 믿을 수 없는 책이 돼버린 현실이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고 있다. 창세기
교육을 제대로 받고 믿어야 우리가 복된 소망을 가지며 지혜로운 종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윤석구 형제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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